하재연 - 네 얼굴은 불빛 아래


네 얼굴은 불빛 아래


  불빛이 타는 거리를 지나 세 사람의 광장을 지나 벌과 꿀의 언덕을 넘으면 푸른 잿빛 거리 지나 초록 기찻길을 지나 붉은 강물의 길로 들어서면 여름 봄 겨울이 가고 깨어진 노란 머리 여자애들이 유리병을 창문 밖으로 던지며 깔깔거리고 나는 온통 젖어 불빛에 타고 가을이 지나가고 내가 가진 모든 동전들이 없어지고 회전목마의 말들이 뚜벅뚜벅 꿈속으로 들어서듯이 네 얼굴은 불빛 아래 돌고

  가로등 아래 트럼펫을 부는 사내 까만 점을 빛내며 웃고 가끔 너는 행복하다 말하고 가끔 너는 슬프다 말하고 네 얼굴은 불빛 아래 아무도 몰라보게 허옇게 분칠을 하고 혁명의 거리를 지나 하나뿐인 길을 건너 삐걱거리는 침대의 보도를 밟으면 내 발자국은 반복되는 마지막 소절 주제를 잊고 느리게 흘러가는 기이한 간주

  네 손가락에 차갑게 얼어 있는 네 손마디에 기록되지 않는 귀청을 뚫고 지나가는 나는 싸구려 선술집의 주크박스에서 삼만 년째 돌고 있는 차가운 맥주 거품처럼 꺼져가는 너의 목소리는 네 머릿속에서만 흘러나오고 너의 목소리는 지상의 만 분의 일 초도 흉내 내지 못하고 북극에서 차를 몰고 달려온 사내의 병 속에서 투명하고 아름다운 알약들이 꽃처럼 피어나고 흩어지고 죽은 같은 음도 고요한 칼날도 지각하지 못하는 네 손가락이 만지는 허공에


하재연 시집; 라디오 데이즈


 
by 잉크 | 2007/06/25 00:42 | 나를 읽어요 | 트랙백 | 덧글(0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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